안녕하세요, 캠핑 다니는 푸드 에디터 정연주입니다. 오늘의 캠차레터에는 레시피가 없습니다. 대신 고속도로 여행길의 추억에 대한 공감대가 있습니다. 도로가 막히면 어디선가 나타나는 군것질 장수처럼 화요일만 되면 찾아오는 캠차레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목마른 어린 시절의 추억 고속도로 옥수수 술빵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 MBTI는 INFJ입니다. J의 특징은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세운 계획이 흐트러질 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라고 하죠. MBTI의 존재를 알기 전에도 저는 이미 계획을 잘 따르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는 저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즉흥적인 계획 변경의 장점을 열심히 찾아내서 스스로에게 세뇌를 시켰어요. 지금은 순간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만 빠르게 극복할 수 있는 정도로는 살기 편안해졌습니다.
그런데 MBTI는 유전적인 면도 크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 저희 가족은 동생을 제외하면 모두가 파워 J거든요. 가족 여행으로 어디를 가든 한달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지도를 구입하고 이동 루트를 같이 확인하고, 밥을 먹을 장소와 일몰 시간까지 체크하곤 했습니다. 저도 J니까 일정을 알고 이동하는 것이 예측 가능해서 편안했죠.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결정적으로 아쉬울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어요. 무엇일 것 같으세요?
바로 운전하다 마주친 길거리 노점상에서 파는 간식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로 이동해서 어떤 식당에서 밥을 먹을지 전부 계획이 있는데 중간에 갑자기 발견한 포도 파는 트럭이나 찐옥수수 파는 노점상에 즉흥적으로 차를 대고 간식을 산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밥을 먹을 계획이 없다 하더라도 보통 이런 트럭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잖아요. 그 순간 즉흥적으로 저걸 사자! 생각하고 운전대를 꺾는다는 결정을 내리기가 참 힘들어요. 그런 부모님을 너무나 이해합니다. 네, 파워 J는 유전입니다.
그래도 가끔 휴게소에 들렀다가 옥수수 술빵을 보면 사주실 때가 있었어요. 자주는 아니었지만요. 그것 또한 이해합니다. 지금은 못 먹는 것이 거의 없지만 어릴 때는 입도 짧고 뱃고래도 작은 초딩이었거든요. 옥수수 술빵 같은 걸 사줬다가는 그야말로 간식 먹고 입맛 버려서(사실은 배가 불러서) 기껏 찾아간 여행지에서 사준 밥을 먹지 않았을 거예요. 이렇게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갑니다.
덕분에 지금도 옥수수 술빵을 보면 채워지지 못한 그리움이 차오릅니다. 술빵은 술떡처럼 옥수수 가루에 막걸리를 넣고 발효시켜 만드는 빵입니다. 술떡 혹은 기정떡이나 기지떡을 먹어보면 쪄서 만드는 설기떡이나 찧어서 만드는 절편과 달리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질감이 매력적이죠. 생막걸리에 들어간 효모로 발효시킨 덕분에 생겨나는 식감입니다. 술떡은 쌀가루, 그리고 술빵은 옥수수가루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 가볍고 말랑한 식감은 비슷하죠. 은은한 막걸리 향과 옥수수 가루의 단향, 그리고 질리지 않고 커다란 한 조각을 순식간에 먹어치울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질감만큼 무던한 맛. 옥수수 술빵의 그 모든 특징을 좋아합니다.
캠핑을 시작한 이후로 즐거운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 하나가 옥수수 술빵을 자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전까지 우리 가족은 그렇게 자주 밖으로 나서는 타입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캠핑카 앞에 셋이 나란히 앉아서 고속도로와 국도를 달리는 내내 수다를 떨고 음악 퀴즈를 내고 한글을 가르치면서 옥수수 술빵도 먹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지나가다 옥수수 술빵을 파는 트럭을 발견하면 제가 항상 이야기를 꺼내요. 나의 부모님은 파워 J라서 지방에 놀러갔다가 복숭아나 포도를 갑자기 사서 집에 보내거나, 길거리에서 파는 간식을 사기 위해 차를 세운 적이 거의 없다. 휴게소 호두과자는 마음껏 먹었지만 옥수수 술빵은 자주 먹지 못해서 볼 때마다 내 안의 어린 내가 저걸 먹고 싶어한다고요. 참고로 시부모님은 정말 양극단의 파워 P시거든요. 저와 전혀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낸 배우자는 ‘차 세우는 게 뭐가 어렵지?’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지만 그래도 저와 함께 술빵 가게를 찾아줍니다.
그런데 사실 캠핑카를 몰면서 파워 P처럼 차를 끼익 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희 캠핑카는 1톤 트럭 기반이거든요. 트럭 짐칸에 캠핑카 공간을 실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앞좌석은 그냥 현대 트럭이예요. 거기 셋이 앉아서 전국을 누빕니다. 엉덩이가 참 아프죠. 그리고 1종 면허가 아니면 운전할 수 없어서 제가 운전대를 잡으면 무면허 운전이 됩니다. 캠핑카 공간에 막혀서 백미러는 따로 부착한 카메라로 봐야 해요. 그리고 일정 속도 이상으로 올라갔을 때 바람이 세게 불거나 대형 트럭이 옆을 슝 지나가면 차가 옆으로 순간이동합니다. 운전하기에 난이도가 있는 편이죠.
그래서 캠핑카를 타고 다니면서 옥수수 술빵을 사려면 생각보다 J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1. 오늘은 캠핑에서 돌아가는 길에 옥수수 술빵을 사겠다고 선언한다. 2. 보통 국도 옆에서 간식을 파는 트럭은 몇 킬로미터 전에 간판 등을 세워둔다. 3. 함께 간판을 살피면서 이번엔 어디서 간식을 살 것인지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토론한다.
이 정도의 계획성이면 몇 %의 J가 될까요…?
아무튼 저는 이런 식으로 술빵과 찐빵, 그리고 옥수수와 자두 등 제철 과일을 캠핑 귀가길에 구입하고 있습니다. 꽤나 술빵을 먹었지만 아직 제 안의 아이는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아요? 만들어보려고 시도했는데 아직 수분 조절 실패 경험 총 4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제 사 먹을 수 있거든요.
오늘의 뉴스레터는 여기까지 채워지지 못한 옥수수 술빵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캠차레터였습니다. 어쩌면 MBTI 유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MBTI가 완전 다른 부모님이어서 저에게 이상한 포즈로 사진의 피사체가 되기를 요구하거나 행선지가 계속 바뀌어서 항상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을 다녔다면, 저는 지금만큼은 파워 J와 파워 I가 아니게 되었을까요, 아니면 이제 내 방식대로 여행을 다니게 되어서 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국내 여행을 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내일은 휴일이죠! 즐거운 공휴일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캠차레터는 다음 주에 다시 돌아옵니다. 감사합니다!